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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은문 주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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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 영은문 주초는 조선 시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의 주춧돌로, 대한민국의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영은문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 조선의 사대 외교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으나, 갑오개혁 당시 자주독립을 위해 철거되었다. 1895년 영은문 철거 부지에는 독립문이 건립되었고, 1979년 독립문과 함께 현재의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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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은문 주초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기본 정보
이름서울 영은문 주초
원래 이름 (한글)서울 영은문 주초
원래 이름 (한자)서울 迎恩門 柱礎
종류파괴된 구조물의 잔재
위치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945
면적1,111 m2
건립 시기1407년
관리 주체서대문구
소유 주체대한민국 정부
지정 정보
지정 종류대한민국의 사적
지정 명칭서울 영은문 주초
지정 번호33호
지정 날짜1963년 1월 21일
이미지
영은문 주초 동쪽 측면
영은문 주초 (동쪽 측면)
독립문 앞의 두 개의 영은문 주초
독립문 앞의 두 개의 영은문 주초

2. 역사

조선1407년중국 (당시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을 영접할 장소로서 '모화루'라는 건축물을 세우고, 1430년에 그 이름을 '모화관'이라 바꾸면서 그 옆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상징적인 관문으로 홍살문을 세웠다.[7] 이 홍살문은 1537년에 개축되면서 '영조문'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1539년에 중국 사신의 건의를 계기로 오늘날까지 알려진 '영은문'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7] 영은문은 사각형 받침돌 위에 세워진 두 개의 긴 주춧돌(주초) 위에 목재로 된 원기둥을 세우고 우진각 지붕을 얹은 형태였으며, 지붕은 청기와로 덮고 각종 동물 모양을 조각한 잡상이 배치되어 있었다.[7]

철거 전 영은문의 모습


'영은문주초'의 사적 지정 표지석


영은문명나라 시기부터 청나라 시기까지 계속되어 온 중국에 대한 조선의 사대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으므로, 조선의 근대화를 막는 중요한 원인이 청나라의 정치·문화적 지배에 있다고 본 개화기의 지식인들은 이를 철거하고자 하였다.[8] 이에 갑오개혁 중 김홍집 내각에서 영은문의 철거가 논의되었다.[8] 1895년 2월에 급진개화파인 박영효는 조선의 자주독립 의지를 대내에 천명하려는 목적으로 모화관과 영은문을 철거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이에 대해 김홍집과 박정양은 모화관에 대해서는 다른 용도로 활용할 것을 제안하며 철거에 반대하였으나 영은문의 철거에는 동의하였다.[8] 이를 계기로 영은문은 철거되고 그 주춧돌만이 남게 된다.[8]

같은 해 3월에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조선청나라에 대한 모든 종속관계를 철폐하고 공식적으로 독립하게 되자, 개화기 지식인인 서재필 박사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은문의 철거된 잔해 바로 앞에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며, 그 주위를 독립을 상징하는 공원으로 바꾸고자 하였다.[9] 이를 수행하기 위해 독립협회가 창립되었으며, 범국민적으로 성금을 거두어 독립문독립관1897년에 세워지게 된다.[9] 이러한 역사적 의의를 기려 1963년 1월 21일에 영은문의 철거된 잔해는 대한민국의 사적 제33호 '영은문주초'로 지정되었다.

2. 1. 조선 시대 영은문 건립과 사대 외교

조선1407년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모화루'를 건립하고, 1430년 '모화관'으로 개칭하면서 옆에 홍살문을 세웠다.[7] 1537년 개축하여 '영조문'으로 불리다가, 1539년 중국 사신의 건의로 '영은문'으로 개칭되었다.[7] 영은문은 사각형 받침돌 위에 두 개의 긴 주춧돌(주초)을 세우고 목재 원기둥과 우진각 지붕을 얹은 형태였으며, 청기와 지붕에는 각종 동물 모양의 잡상이 배치되어 있었다.[7]

영은문명나라 시기부터 청나라 시기까지 조선의 사대 외교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7][8] 조선중국을 조선보다 훨씬 큰 나라로 존중하는 사대(사대주의) 외교 정책을 유지했다.[1] 갑오개혁 당시 개화당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사대 정책 폐기를 추진했고, 김홍집 내각은 이를 과시하고자 했다.[1] 1895년 2월, 박영효는 중국과의 사대 관계 단절을 보여주기 위해 영은문 철거를 제안했고, 김홍집과 박정양의 지지를 얻어 철거되었다.[2][8]

2. 2. 갑오개혁과 영은문 철거



조선명나라 시기부터 청나라 시기까지 중국에 대한 사대를 상징하는 건축물인 영은문을 유지해왔다.[7] 갑오개혁 시기, 개화파 지식인들은 조선의 근대화를 막는 중요한 원인이 청나라의 정치·문화적 지배에 있다고 보고 영은문 철거를 추진하였다.[8]

1895년 2월, 박영효는 조선의 자주독립 의지를 대내에 천명하려는 목적으로 영은문 철거를 제안하였다.[8] 김홍집 내각은 박영효의 제안에 동의하여 영은문 철거를 결정하였다.[8][2] 이는 조선이 더 이상 중국의 속국이 아님을 대내외에 선포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1] 영은문은 철거되고 그 주춧돌만이 남게 되었다.[8]

2. 3. 독립문 건립과 독립협회 활동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조선청나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3] 서재필영은문 철거 부지에 독립문을 건립하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삼고자 하였다.[9] 이를 위해 독립협회가 창립되었으며, 범국민적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9] 1896년 11월에 시작되어 1897년 독립문독립관이 완공되었다.[3][9] 1963년 1월 21일, 영은문 주초는 대한민국의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었다.[3]

3. 이전과 보존

1970년대 성산대로 건설 과정에서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의 이전 문제가 논의되었다.[10][4] 전문가들은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를 함께 이전하여 역사적 맥락을 보존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10] 특히 독립문이 사대의 잔해를 넘어 조선의 독립을 상징하는 서재필의 의도대로 영은문 주초를 내려다보는 경관 구조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주목할 만하다.[4]

1979년 7월 26일,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는 현재 위치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근린공원 내로 이전되었다.[10] 이전 후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는 보수 공사를 거쳐 1980년 3월 11일 준공되었다.[10][4]

4. 현재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는 서대문 독립공원 내에 위치하며, 시민들에게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대문독립공원은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는 다양한 시설과 조형물을 갖추고 있다. 매년 독립운동 관련 기념행사가 개최되어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참조

[1] 서적 Korea-China Relations in History and Contemporary Implications https://link.springe[...] Palgrave Macmillan Cham 2018
[2] 웹사이트 신편 한국사 - 근대 - 40.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III. 갑오경장 - 2. 제2차 개혁 - 3) 제2차 개혁의 내용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02
[3] 서적 'Difficult Heritage' in Nation Building - South Korea and Post-Conflict Japanese Colonial Occupation Architecture https://link.springe[...] Palgrave Macmillan Cham 2019
[4] 간행물 A Study on the Method of Conserving Cultural Heritage in Urban Development in the 1970s in the Process of Determining the Relocation of Independence Arch https://www.kci.go.k[...] 2021
[5] 뉴스 서울 영은문 주초 (서울 迎恩門 柱礎) http://www.heritage.[...] 文化財庁 2022-07-02
[6] 웹인용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명칭 변경 및 지정·해제 고시 - 문화재청고시 제2011-116호 http://gwanbo.mois.g[...] 대한민국 관보 2022-07-29
[7] 웹인용 서울 영은문 주초 - 문화재 설명 http://www.heritage.[...]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 종목별 검색 2022-07-29
[8] 웹인용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Ⅲ. 갑오경장 - 2. 제2차 개혁 - 3) 제2차 개혁의 내용 http://contents.hist[...]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2-07-29
[9] 뉴스 독립문, 일제 아닌 중국한테서 독립 상징 https://www.hani.co.[...] 한겨레 2017-11-20
[10] 뉴스 기세황. (2021). 독립문의 이축 결정 과정을 통해 본 1970년대 도시개발 속 문화유산 보존 방식. 대한건축학회논문집, 37(9),114-115, 121-122. https://www.dbpia.co[...] 2022-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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